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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부정공>경암공휘병헌묘갈명(警菴公諱秉憲墓碣銘)
警菴公諱秉憲墓碣銘 淳昌趙氏之居湖南族類甚繁亦多文學行誼謹之士警菴趙公其宗中長德也公諱秉憲字平章初諱浚瑞字平汝高麗檢校門下侍中璋爲上祖後有諱元吉號農隱策勳封玉川府院君諡忠獻諱瑜號虔谷典農寺副正短喪之時負土營葬廬墓三年罔僕我朝杜門自靖遯跡于順天當有縣兩世並旌閭爼豆虔谷第二子兵使諱崇文與其子哲山同殉丙子六臣禍父 贈兵曹判書諡節愍子 贈重蒙敎官俱施棹楔享莊陵壇及肅慕殿庭又配食謙川院曰弘淳曰在壽曰泰錫號龜溪其曾祖祖禰三世也妣耽津崔氏洙擎女公以憲宗癸卯二月二十三日生自幼聽慧溫良不從群兒遊在父母膝下愉色婉容承淳無違及授室分爨晨昏定省非有疾不失尺寸故時或不見則親畢惟憂而臨問焉癸亥龜溪公卜居十里地伯仲二兄隨之二舊田宅委公而治之每五日一覲必求川魚海味包而供之母夫人嘗下堂傷腰公即取狗膓糞汁而試之進必先嘗癸酉遭外艱水醬不入口攀號幾滅性及葬哭墓不以風雨廢之中歲徙居禾村是伯氏俸母夫人寓谷城之東山而未幾奄歿自禾距東爲一舍隔以峻嶺雖祈寒盛暑覲行無闕至則必留連侍側慰藉夜哭之懷凡潔簟櫛髮洗牏等節躬自服勞不委諸人辭退淚輒潜然甲午東匪猖獗公奉母避難織屨以供甘旨己亥丁憂公年己五十七哀慟號冤如乳兒之失慈母居喪執禮不以老衰而或懈値考妣諱日行素齊戒必致如在之誠臨祭涕淚滿席事諸兄極愛敬生而埍箎湛樂歿而哀痛過節此其孝友之天植也公早年就學不煩敎督而勤於課程讀小學必以踐履自期成童後將詩經爲三餘之工獨處研究罕作咿唔而歲内成誦全帙龜溪公輪卷歷試稍未爛熟者惟一桑柔章餘皆應講如流無所礙滞焉治擧業不用程式專務理勝而早知功令外有用心處往拜蘆沙奇先生得聞爲學之要難疑答問充飲河之量讀書取聖賢切要語隨錄成篇名曰聖學錄此學問之自得也公嘗夢見我先君子勉庵先生受勤謹二字敎寬而異之尤切嚮慕遂徒贄謁于湖西又嘗從遊於方文蕭寺之間講論吟哦以償宿願丙午春聞先生擧義與從子璣燮馳往至淳昌則先生己被押矣欲隨未能歔欷而歸及聞易簀加麻三月遣子彥燮操文致奠公與族叔石淵奇松沙宇萬鄭月波時林鄭日新義林諸賢爲道義交於石淵則收拾散稿俾傳于後此其事賢友仁之實也至若先王法服終身無改島夷恤金矢死不受庚戌屋社之變却食三日戊午泣弓之後永廢筆硯敎子則曰吾雖從學竟無所成爾代父工夙夜無懈治產則曰吉凶稱有無節用勝生財此又立身刑家之大略也卒于庚申九月二十七日享年七十八有遺稿若干卷葬住洞先兆丑坐原配尚州朴氏亨材女賢有婦德善相夫子墓祔左有六男一女男長彦燮志行克肖次康燮奎燮孝燮早夭啓燮亮燮女適慶州金沂柱長房二男重明重杸二房一男重蘼二女長適安某次幼三房三男重翊出系孝燮後重曄季幼一女幼四房一女適柳鍾三五房三男重烜重斅重釗六房四男重弼重藺重鐎重一女適鄭某金沂柱三男並烈朱烈在烈二女柳明秀邊祺燮重明一男匡會二女李相泰季未行餘不盡記彦燮以其族大父石汀寅錫氏所爲狀來請墓道之銘不佞於公猥荷忘年薰染德義者也安敢以匪其人辭銘曰愛親敬兄仁義之實百行萬善允從玆出况復邃學蔚有可述尚絅之文後素之質世鲜知德終老蓬蓽我銘公墓辭罔或溢 月星 崔永祚 撰 경암공휘병헌묘갈명(警菴公諱秉憲墓碣銘) 호남(湖南) 지방에는 순창조씨(淳昌趙氏)가 많은 종족(宗族)을 이루고 있으며 문학행의(文學行誼)의 선비가 많은데 경암(警菴) 조공(趙公)이 그 종중(宗中)의 장덕(長德)이다. 공의 휘는 병헌(秉憲), 자(字)는 평장(平章)이나 처음엔 준서(浚瑞) 자(字) 평여(平汝)로 불렀다. 고려(高麗)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장(璋)이 상조(上祖)이며, 그뒤 휘 원길(元吉) 호(號) 농은(農隱)은 책훈(策勳)으로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시호(諡號)는 충헌(忠獻)이며, 휘 유(瑜) 호(號) 건곡(虔谷)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은 고려말 단상(短喪)이 성행할때 묘막살이 삼년을 살았으며 아조(我朝)에는 벼슬하지 않고 순천(順天) 부유현(當有縣)에 은거하였는데 양세(兩世)가 모두 정려(旌閭)가 있으며 춘추제사를 모신다. 건국(虔谷)의 둘째 아들 병사(兵使) 숭문(崇文)은 그 아들 철산(哲山)과 함께 병자(丙子) 육신(六臣)의 화(禍)에 순절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시(諡) 절민(節愍)이 되었고 아들은 증동몽교관(贈重蒙敎官)이 되었으며 정려(旌閭)도 있고 장릉단(莊陵壇), 숙모전(肅慕殿)등에 배향되었고 또 겸천서원(謙川書院)에도 배향되었다. 홍순(弘淳)·재수(在壽)·태석(泰錫) 호(號) 귀계(龜溪)는 공의 증조·조·부·삼세(三世)이며 비(妣)는 탐진최씨(耽津崔氏) 수경(洙擎)의 딸인데, 헌종(憲宗) 계묘(癸卯一八四三)년 二월 二十三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때부터 청혜온양(聽慧溫良)하여 아이들과 어울려 유희(遊戱)하지 않았고 부모 슬하에 있을 때는 기쁜 얼굴과 온화한 모습으로 부모 뜻을 잘 받들어 어김이 없었고, 장가들어 분가한 뒤에는 저녁으로 찾아가 정성(定省)을 하되 몸이 아프거나 하지 않으면 조금도 시간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어쩌다가 공이 보이지 않으면 부모는 걱정스러워 묻고는 하였다. 계해(癸亥)년 귀계공(龜溪公)이 십리(十里) 밖으로 이사를 가자 백중(伯仲) 두형이 그를 따라가면서 옛 전택(田宅)을 공에게 넘겨주고 갔다. 이에 공은 五일만에 한번씩 찾아보며 반드시 민물고기와 해물(海物)을 구해가지고 가서 대접해 드렸다. 모무인(母夫人)이 언젠가 당위에서 내려오다 허리를 다쳤는데 공이 구장분즙(狗膓糞汁)을 구해다 드릴 때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으며, 계유(癸酉)년 부친상을 당하자 음식을 전혀 입에 가까이 하지 않은 채 실성한듯 울부짖었으며 장사한 뒤에도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묘에 찾아가 살폈다. 중년에 공이 화촌(禾村)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 공의 백씨(伯氏)는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곡성(谷城) 동산(東山)에 살고 있었는데 얼마 후에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화촌(禾村)에서 동산(東山)까지는 三十여리나 되고 높은 재(嶺)가 가로질러 있었다. 그러나 공은 추운 겨울 무더운 여름에도 빠뜨리지 않고 찾아가 뵈었으며 찾아뵐 때는 반드시 곁에서 모시고서 아들 잃은 슬픔을 위로해 드리고 자리청소며 머리빗는 일 등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하였으며 그 곳에서 돌아올 때는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갑오년 동학란이 일어나자 공은 모친을 모시고 피난을 간뒤 신을 삼아 팔아서 모친을 봉양하곤 했는데 기해년에 모친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때 공의 나이 五十七세 였는데도 어린아이가 어미를 잃은 것처럼 애통해하였고, 상중의 몸가짐은 노쇠(老衰)하다고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은 또 부모의 제삿날이 돌아오면 소의소식(素衣素食)으로 재계하여 반드시 살아계실 때처럼 정성을 쏟고 제사를 지낼 때는 눈물이 자리를 적셨다. 또 여러 형들을 애경(愛敬)으로 섬겨 생전에는 훈지담락(塤篪湛樂) 하였고 죽은 뒤엔 예절에 지나치게 애통해 했으니 이는 그의 효우(孝友)가 하늘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인 것이다. 공은 어려서 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저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며 소학(小學)을 읽을때 몸소 실천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고, 나이가 제법 든뒤엔 삼여지공(三餘之工)을 택하여 시경(詩經)을 혼자 연구하여 그다지 많이 읽지도 않고 한해 안에 시전(詩傳) 전질을 외우었다. 귀계공(龜溪公)이 책을 바꾸어 가며 시험해보니 상유장(桑柔章) 한 장만 난숙(爛孰)하지 못하고 나머지는 대응하는게 흡사 물 흐르듯 하여 막힌데가 없었다. 과거공부를 하면서도 거기에다 뜻을 두지는 않고 오로지 진리만을 추구하였고 일찍부터 과문공부 외에 마음 쓸 곳이 있는 줄을 알고 노사(蘆沙) 기선생(奇先生)을 찾아가 학문하는 요지를 얻어듣고 난의(難疑)한 것을 문답하여 음하(飲河)의 양을 채웠다. 그리고 글을 읽을 때 성현(聖賢)의 절요(切要)한 말을 수록하여 책을 만든뒤 성학록(聖學錄)이라 이름붙으니 이는 공의 학문이 자득한 것이라 하겠다. 공이 언제인가 꿈에서 우리 선군자(先君子) 면암선생(勉庵先生)을 보았는데 선생이 「근근(勤勤)」 두 글자를 가르쳐 주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 그 뒤로는 더욱 선생을 사모하여 도보로 호서(湖西)까지 찾아가 지알(贄謁)하였고 또 지리산(智異山) 유람길에 따라갔다가 화엄사에서 강론음아(講論吟哦)하여 숙원(宿願)을 이루었다. 병오년 봄, 선생이 의거(義擧)했다는 말을 듣고 종자(從子) 기섭(璣燮)을 데리고 달려가 순창(淳昌)에 도착하니 선생이 이미 압송되어간 뒤였다. 공이 그뒤를 따르려 했으나 어쩔 수 없어 한탄하면서 돌아와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삼월복(三月服)을 입고 아들 언섭(彦燮)을 공의 집에 보내 제문을 읽고 전(奠)을 올리게 하였다. 공은 또 족숙(族叔) 석연(石淵)·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월파(月波) 정시림(鄭時林)·일신(日新) 정의림(鄭義林) 같은 선비와 도의(道義)로 사귀었으며, 석연(石淵)에 있어서는 그의 산고(散稿)를 수습(收拾)하여 후세에 전할 수 있게 하니 이는 공의 사현우인(事賢友仁)하는 그 실상이라 하겠다. 공은 또 옛 선왕(先王)이 물려준 법복(法服)을 한평생 바꾸지 않았고 왜인(倭人)이 보낸 구제금을 맹세코 받지 않았으며, 경술(庚戌)년 합방(合邦)때는 三일을 먹지 않았으며 무오(戊午)년 국상을 당한 뒤부터는 아예 필연(筆硯)을 대하지 않았고 자식을 가르키면서 말하기를, 『내 비록 학문에 종하해오긴 했다만 끝내 아무 이루어 놓은게 없으니 너희들이 이 아비 뜻을 이어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말라.』 라고 하였고 집안 살림을 할 때는, 『길사(吉事)·흉사(凶事)를 두고 집안 형편에 알맞게 하고 생산하는 양에 비해 더욱 절약히 쓰라.』 고 가르쳤으니 이는 공의 입신 형가(立身刑家)한 대략(大略)이라 하겠다. 공이 경신(庚申) 九월 二十七일 세상을 뜨니 향년 七十八세였다. 유고(遺稿) 약간이 있으며 묘는 주동(住洞) 선영(先塋) 있는곳 축원(丑原)이며 부인은 상주박씨(尙州朴氏) 형재(亨材)의 딸로 부덕(婦德)이 있어 남편을 잘 도왔으며 묘는 공과 같은곳 왼쪽에 있다. 六남一녀를 두었는데 장남 언섭(彦燮)은 지행(志行)이 훌륭하였고, 강섭(康燮)·규섭(奎燮)·효섭(孝燮)은 일찍 죽고 밑으로 계섭(啓燮)·양섭(亮燮)이 있으며 딸은 경주(慶州) 김기주(金沂柱)에게 출가했다. 장방(長房)의 두 아들은 중명(重明)·중수(重杸)이며, 이방(二房)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 이름이 중역(重蘼)이고, 한 딸은 안모에게 시집가고 또 한 딸은 아직 어리다. 삼방(三房)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중후(重詡)는 효섭(孝燮)의 양자가 되었고 중엽(重曄)과 막내는 어리고 딸 역시 어리다. 사방(四房)의 한 딸은 유종삼(柳鍾三)에게 시집갔고 오방(五房)의 세아들 중원(重烜)·중효(重斅)·중쇠(重釗)이며, 육방(六房) 네 아들은 중필(重弼)·중인(重藺)·중초(重鐎)·중일(重一)이요 딸은 정모(鄭某)에게 시집갔다. 공의 딸은 김기주에게 시집가 三남二녀를 두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並烈·朱烈·在烈이며, 딸은 柳明秀·邊祺燮에게 시집갔다. 중명(重明)은 一남二녀를 두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광회(匡會)요, 딸하나는 이상태(李相泰)에게 시집가고 끝 딸은 어리다. 나머지는 다 쓰지 않는다. 언섭(彦燮)이 그의 족대부(族大父) 석정(石汀) 인석씨(寅錫氏)가 지은 행장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묘에 새길 글을 청한다. 외람되게 공과의 연배를 잊고 공의 덕의(德義)를 받아온 내가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어버이 사랑, 형의공경 이것이 인의(仁義)라지. 愛親敬兄仁義之實 모든 행실, 모든 선이 여기에서 나느니라. 百行萬善允從兹出 이 밖에 심오한 공의 학문 기술할게 많은 것은, 况復邃學蔚有可述 가리운듯 밝은 문채에 또다시 하얀 바탕이었어라! 尚絅之文後素之質 세상에 덕을 아는지 적어 이대로 늙었구려…… 世鲜知德終老蓬蓽 공의 묘에 새기는데, 지나친 말 할소냐! 我銘公墓辭罔或溢 月星 崔永祚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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